2009년 6월 10일 수요일

제주감귤 유래 (조선시대) by [출처] 감귤의 유래..(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태조원년(1392년)부터 제주도 귤유(橘柚)의 공물에 대한 기록이 계속되고 있다. 세종 8년(1426년)에는 호조의 게시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해안에도 유자와 감자를 각 관서에 심게 하였다.

감귤(柑橘)이란 용어는 세조원년(1456년)에 제주도안무사에 내린 유지<세조실록(世祖實錄) 2권>에 나온다.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로 시작된 유지에는 감귤의 종류간 우열(금귤, 유감, 동정귤이 상이고 감자와 청귤이 다음이고 유자와 산귤이 또 그 다음), 제주과원의 관리실태와 공납충족을 위한 민폐, 사설과수원에 대한 권장방안, 번식생리와 재식확대, 진상방법의 개선방안 등을 기록하고 있다.

감귤은 약용으로, 생과용으로 그리고 제사용으로 매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역대왕실은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과실세를 제정하는 동시에 관영 과원의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과원과 상납과실을 관장하기 위하여 중앙에 전담관서를 두었으니 고려조의 동산색(東山色), 조선의 상림원(上林園, 후에 장원서<掌苑署>로 바뀜)이 그것이다. 조선의 상림원은 고려의 동산색을 개선한 것이므로 관영과원의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고 볼 수 있다. 지방 관영과원은 관찰사와 수령 책임하에 관노비나 군졸 등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으나 때로는 성적이 부진하여 민간의 과수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관은 진상물량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민간 과수원의 발달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 6권에는 제주 3읍에 희귀한 감귤나무를 심고 장려하며, 그 관리상태에 따라 상벌을 받도록 하였다.노예계급인 노비로 있는 사람이 당감자(唐柑子)와 당유자 각 8주, 유감 20주, 동정귤 10주를 심으면 노비계급을 풀어 주었다. 일반농가는 당감자와 당유자 각 5주, 유감과 동정귤 각 15주를 심으면, 면포 30필을 상으로 주었다.그러나 감귤나무를 심은 후 관리가 소홀할 경우, 상으로 준 면포의 반환은 물론 노비로 환원하도록 하는 강경한 장려 방침이 기록되어 있다.

탐라지(耽羅誌, 효종 4년, 1653년)에 실린 과원총설(果園總說)에 의하면 제주 3읍의 관과원은 36개소(제주 22, 정의 8. 대정 6), 12종, 3,600여주였으며 이때 공납과 진상을 위한 총물량은 생과 8종류 86,053개여와 약재가 116근 10량으로 계산된다. 관과원의 소산만으로는 이 수량을 채우기 쉽지 않았고 또 해난사고 등으로 수송에 애로가 많았다. 1704년 이형상  제주목사 당시에는 관과원이 42개소(제주29, 정의 7, 대정 6)로 증가되었었다. 감귤재배는 관리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공납량의  연차적인 증가로 지방관리들의 횡포까지 가중되어 민폐가 많았던 관계로 이조말기에는 차츰 재배주수가 감소되었으며 고종 31년(1893년) 진상제도가 없어진 이후는 과수원이 황폐화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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